프랑스인 남편과 한국에서 살았을 때 하루는 롯데마트에서 디종 머스터드를 본 적이 있다. 남편의 프랑스인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로 “오 디죠옹” 하고 외치며 이 “무 타드” (프랑스어로 발음한 머스터드”가 얼마나 맛있고 오리지널이니 하며 조잘조잘 떠들던 게 생각난다.
그때는 지방 분권화가 비교적 잘 되어있는 프랑스라는 나라는 지역에 따라 문화가 크게 다르다. 하지만 그때는 겨자면 겨자지 왜 이렇게 호들갑이니 했었다.
현재 우리 둘다 타국인 독일에 거주하다 보니 여름이나 연말 휴가는 2주 정도씩 넉넉히 잡아 한국과 프랑스의 가족 집에서 보낸다. 코로나 격리 때문에 남편의
고향인 프랑스 서남부에 위치한 보르도에서 이번 2021년 여름을 나기로 했다. 아직도 코로나가 만연한상황이라 이동이 자유롭게 자차로 ‘2021년 로드 트립’을 계획했고 브루고뉴 (Bourgogne)의 한 도시 디종 근처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프랑스의 브루고뉴(Bourgogne)라는 지역은 보르도와 비슷하게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다. 바닷가 마을이 주변에 있는 보르도와는 다르게 브루고뉴를 대표할만한 큰 관광 도시가 딱히 없어서 주변 작은 마을에 정착을 하고 하루 이틀 정도 와인 밭을 돌아다니며 투어를 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마치 보성 녹차밭을 떠올리는 것처럼 경사진 곳에 위치한 브루고뉴 포도밭의 아름다움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가정의 대소사는 내가 대부분 챙기는 편인데 이번 여정는 남편에게 모든 계획을 위임했다. 그리고 남편은 이번 숙박 장소로 프랑스식 민박집인 지트(gîte)를 예약했다.
“우리 대체 어디를 가는거야?” 라고 여행 당일 차에
타서 물어보자 “브루고뉴의 어떤 마을” 이라고 하길래 나는 디종에서 겨자를 사서 원조의 맛을 먹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착을 하고 보니 이 마을엔 정말 슈퍼도 하나 없는 게 아닌가!
순간 대체 내 남편이 날 어디로 데리고 온거지
라고 내 눈엔 동공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데 주차장을 못 찾아갈 곳을 잃은 우리 앞에 프랑스인 아저씨가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주차장으로 우리를 인도해줬다.
세상 밝은 웃음으로 “싸 바?” 하며 안부 인사를 건네는 프랑스인 아저씨, 마스크를 쓰고 주섬주섬 차에서 나가니 얼른 내 짐을 들어주시며 숙소로 안내를 해주셨다.
비교적 처음 낯을 가리는 사람들이 많은 독일의
남부 지방에서 6년간 살다 보니 이런 과도한 친절에 나는 살짝 뒷걸음질을 치게 된다. 가끔 이런 모습의
내가 낯설고 싫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언제부턴가 친절을 단순한 친절로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30대의
나.
그렇게 숙소에 들어가서 안내를 받는데 말이 민박집이지 방 안에 사우나와 월풀이 함께 있는 너무 예쁜 다락방이었다. 창문을 살포시 열어보니 미쳐 그치지 않은
보슬비가 주황빛 지붕에 토토톡 하고 부딪히는 소리조차 리듬처럼 들리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이런 지트라는 형태의 프랑스 민박은 보통 한 집을 개조해서 아예 따로 입구가 있는 숙소를 내어 준다던지 방 하나를 자유롭게 쓰게 하는 식으로 되어있다. 한국식 민박과 비슷하게 아침 식사를 제공하기도 하고 원한다면 저녁도 미리 요청할 수 있다.
원래 사람들은 여행을 하다 보면 꼭 한 가지씩 중요한 포인트가 있지 않은가. 나는 성이 있는 곳이 좋아, 나는 사람 사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 혹은 나는 탁 트인
자연이 있는 곳이 좋아. 내게는 맛있는 음식이, 남편에게는 푸짐한 아침식사가 바로 그 포인트인데 이 지트는 두 부분을 만족하는 곳이라서 선택을 했다고 한다.
슈퍼도 없는 마을이라 마을을 돌아다니는 건 우선 마다하고 방에서 여독을 좀 풀다가 예약한 저녁식사를 먹으러 민박집 거실로 내려갔다. 민박집 아저씨의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애들 두 명이 무료하게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우리는 식기가 놓여 있는 식탁으로 안내를 받았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다른 호텔처럼 따로 식사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정말 프랑스 가족에게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는 느낌 아닌가!
문득 내 20대 초반에 남편(그 당시엔 남자 친구)과 했던 철부지 시절의 여행들이 떠올랐다. 만 원짜리 호텔에 묵으면서 아무 여행자들과 왁자지껄 어울리며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던 그 시절, 여행지에서 만난 기이한 인연들, 예를 들면 일본 라면 포장마차에서 만난 일본 은행가 아저씨와 부하직원 그리고 두 여학생과 가라오케에 갔던 일들이 머릿속에 차근차근 떠올랐다.
부엌에서 갑자기 와인을 갖고 오면서
“와인 좋아하세요?”라고 묻는 아저씨, 우리는 술을 즐기는 커플이다.
당연히 Bien Sûr! (당연하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아저씨도 신나서 우리 앞에 있는 와인잔에 쪼르르르르 브루고뉴 지방의 화이트 와인을 따라주셨다.
아저씨가 브루고뉴의 화이트 와인의 맛과 향 그리고 색을 느껴보라고 하셨다. 와인을 살짝 들어서 색을 보고 코를 잔에 가까이해서 향을 맡고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물고 첫맛부터 끝 맛까지 느끼는 그런 행위. 처음엔 낯간지러웠지만 언제부터 익숙해진 나의 코는 벌써 킁킁댔다.
코로 맡는 와인의 향은 스위트 하면서 향긋했고 혀에
느껴지는 살짝 차가운 드라이함 그리고 상큼한 포도의 향은 달콤했다. 너무 fruity하지도 드라이하지도 않은 이 와인 무엇이냐!!!
아저씨께서 본인 잔에 와인을 따라서 우리 테이블 앞에 앉으시며 이 와인을 알게 된 스토리를 말해주기 시작했다.
사실 브루고뉴 이 주변에 와인이 유명해지면서 너무 와인의 브랜드나 네임벨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라 어떤 와인은 그 지역 토박이들이 더 이상 살 수 없을 만큼 비싸졌다고 한다.
그래서 차라리 본인은 이렇게 알게 모르게 아름아름 판매하는 와인을 직접 가져온다며 비법을 알려주셨다.
“레이블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 와인병 안에 들어있는 와인 그 자체와 본인이 즐기고자 하는 취향이 중요한 거지”
사실 맞는 이야기이다. 와인을 쉽게 접하지 못했을 때는 와인은 비싸고 분위기 좋은 스테이크 레스토랑에서나 몇만 원을 주고 마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와인을 마시려면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와인 초보자를 위한 지식 사전 따위의 책들을 찾아보며 레이블에 집중했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일까. 독일에 살게 되면서부터 내 장바구니엔 아름아름 이름 모르는 와인 몇 병씩 사서 모아놓기 시작했고 그 와인들은 평일 저녁에도 간단한 안주거리 풀어놓고 남편과 하루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는 중요한 메신저가 되기도, 꽃을 꼽아놓는 꽃병이 되기도 했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매운 음식이 당기듯, 약간 알딸딸함을 느끼고 싶을 때는 보르도 레드와인 같이 깊은 맛을 내는 진한 와인이, 여름의 시원함을 즐기고 싶을 때는 브루고뉴의 고지대에서 제배된 포도로 만든 가벼운 화이트 와인을 찾게 된다.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면서 나만의 취향이 생겼다.
와인뿐만 아니라 한 때는 “레이블”에 집중했던 시기가 있다. 나가 어떤 공부를 하느냐보다,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대학과 어떤 회사에 다니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내 스스로의 취향,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보단 그 집단이 가지는 취향에 나를 묻어가려고 했었다. 어쩌면 나에 대해 아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고 그 레이블 안에서 마음의 안락함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자신 그대로를 표현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음주가는 음주가를 좋아한다. 눈빛과 눈빛이 통하고 분위기가 통한다. 그날 우리 주변의 공기는 와인향으로 가득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알딸딸했다는 소리일 수도 있다).
한 병이 비워지고 두 병이 비워지고 어쩌다 보니 호텔 주인집 아저씨와 두 병의 와인을 함께 비웠다.
두 아이들이 “papa on mange quand?”이라며 귀여운 목소리로 밥을 애타게 찾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있는데 애들이 밥을 찾는 게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너무 당연하다. 사실 저녁 9시까지 밥을 안 주고 손님들과 놀고 있는 아빠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 애들이 내게는 경이롭게 느껴졌다.
아저씨가 부엌으로 가시더니 쓱쓱쓱 저녁 요리를 해오셨고 원래 같으면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드시는 것 같은데 이미 와인을 두 병 같이 비운 사이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Entrée 앙트레는 달팽이 파이였다.
정말 달팽이 껍데기에 들어있어서 버터 소스로 요리가 된 요리는 전에 먹어봤는데 이렇게 파이 형태의 달팽이 요리는 처음이었다. 프랑스 남서부에서도 흔치 않은
음식인지 처음 보는 것을 먹어보는 남편의 눈에는 반짝거림과 긴장감이 공존했다.
칼로 슥삭 자르자 안에 크림이 살짝 흘러나왔다. 화이트 와인을 증발시키며 향을 입힌 짭조름한 맛이었다. 달팽이의 쫄깃함이 골뱅이를 연상시켰다. 떡의 쫄깃함, 버블티의 타피오카, 올방개묵 말림과 같은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달팽이 요리에 거부감이 없었다. 남편이 한국에 왔을 때도 한국의 곱창 같은 난이도가 쉽지 않은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먹으면서 프랑스 음식과 한국의 음식이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 달팽이 파이도 그런 느낌 아닐까?
아저씨는 원래 식당을 운영하는 요리사셨다고. 하루에 14시간 넘게 일을 하다 보니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부족해서 민박집 운영을 결정하셨고 본인은 지금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코로나가 터지면서 사실 어려운 점도 있다고 이야기를 나눠주셨다.
그래도 본인은 스스로가 위 너 같다고 하시며 껄껄 웃으시는 아저씨 뒤엔 후광이 비쳤다.
더 놀라운 점은 지금 있는 집은 다 본인이 손으로 지은 집이라는 거였다. 이탈리아 이민자셨던 사장님의 조부모님께서 프랑스로 이민을 오면서 궂은일을 맡아했고 그 결과로 시골 농가에 집을 마련하실 수 있었다. 민박집 사업을 결정한 후에 우선 레스토랑을 그만두고 이곳저곳에서 일을 하면서 공사의 기초를 배웠다. 그리고 조부모님의 결실을 스스로 재료까지 다 선택해서 1년 넘게 레노베이션을 했다고 한다.
얼마나 낭만적인가. 과거와 미래의 연결 그리고 육체적, 감성적인 낭만이 공존하는 민박집에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삶이란.
나라면 이런 곳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저녁 식사의 즐거움과 동시에 재밌는 상상을 하게 된다. 아마존에 사표를 던지고 시골로 내려가 민박집을 하며 손님들을 맞고 내 이야기를 하는 상상. 배가 고파서 나도 모르게 배달 음식을 시키고자 했지만 배달음식이 오지 않는 상상. 이 와중에도 배달음식을 생각하는
나는 천상 도시 사람인가!
와인을 한 병 더 비우고 더 주시려고 하는 제롬 사장님께 우리가 마셨던 와인을 6병을 주문을 부탁드리고 뜻밖의 즐거운 저녁을 마무리했다.
이렇게 같이 먹고, 마시고,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내가 아는 사람, 내가 알게 될 사람이 있는 세상은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 아닐까.
2021년 7월의 하루 in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프랑스
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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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따로 어딘지 물어보시는 분이 계셔서 바로 올려드릴게요:) 저는 저어어엉말 너무 좋았습니다.
L'Armonia
+33 6 58 94 19 12
https://goo.gl/maps/Fk1S64GS9zEi1RYw5
#여행 #travel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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